요한계시록어케읽죠 QT어떻게해야할까요 요한계시록이요..qt책이있는데 읽고 삶에적용하고싶어요.. 근데막막하네요. 생각보다 하나님과좀더가까워지고싶어요. 도와주세요. 요한계시록읽는법좀사이비는 안받아요.
QT어떻게해야할까요 요한계시록이요..qt책이있는데 읽고 삶에적용하고싶어요.. 근데막막하네요. 생각보다 하나님과좀더가까워지고싶어요. 도와주세요. 요한계시록읽는법좀사이비는 안받아요.
하나님과 좀더 가까워지고 싶다면 우선 계시록이 아니라 신약과 요한복음과 요한일서를 많이 읽고 묵상하는 것을 권해드립니다.
[요]14:14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14:1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
[요]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요]14: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요]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요]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요]14:21 나의 계명을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잠]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약]4: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약]4:7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4:8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
[고전]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고전]12:5 직분은 여러 가지나 주는 같으며
[고전]12:6 또 사역은 여러 가지나 모든 것을 모든 사람 가운데서 이루시는 하나님은 같으니
[고전]12:7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
계시록은 바르게 해석하려면 그 체계를 알아야 하기 때문에 어렵습니다. 계시록에 대해서는 bst 계시록 강해 같은 책이 바르게 해석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소 어렵기는 하지만 로이드존스의 성경교리강해제 3권이 좋습니다.


그리고 아래의 글들도 계시록 해석에 아주 유익합니다.
본서신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발생할 인류 미래의 사건들을 보여 주는 신약성경 유일의 예언서이다. 또한 본서신은 구원받은 성도의 영화롭고 복된 내세를 보여주는 은혜와 소망의 책인 동시에 끝까지 복음을 거부하고 대적하던 사탄과 그 추종 세력들이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처해지는 멸망과 심판의 책이기도 하다. 이런 측면에서 본서신이야말로 현세와 내세를 연결하는 신령한 가교(架橋) 역할을 한다 할 수 있다.
헬라어 성경에서 본서신은 ‘아포칼립시스 이오안누’로 불리는데, ‘요한의 계시’란 뜻이다. 영어성경 흠정역(KJV)에서는 본서신을 일컬어 ‘The Revelation of St. John The Divine’(신령한 사도 요한의 계시)으로 명명한다. 이 제목은 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1:1의 말씀에서 유래되었다.
본서신에는 여러 차례 서신의 기록자가 요한임을 밝히고 있다(1:1, 3, 9; 22:8). 물론 이 요한이 누구냐에 대해서는 다소 이견도 있으나(Eusebius, Dionysius) 초대 교부로부터 오늘날까지 대다수 학자들은 사도 요한을 본서신의 기록자로 인정한다(Irenaeus, Tertullian, Origen, Justin Martyr).
본서신의 기록시기에 대해서는 글라우디오 황제(A.D. 41-54년경) 당시, 네로 박해 당시(A.D. 64년 경), 네로 박해 직후 등의 견해가 있다. 그러나 전통적으로 본서신은 기독교 박해가 로마를 넘어 제국 전역으로 확대되었던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 81-96년경) 황제 때 기록된 것으로 보인다(A.D. 95-96년경). 그는 네로 황제 못지 않게 기독교에 대해 혹독하게 박해를 가하였으며, 자신을 ‘주와 신’(Dominus et Deus)으로 호칭하게 했다. 이때 에베소에서 목회하던 사도 요한 역시 당시 정치범 수용소로 악명 높던 밧모(Patmos) 섬으로 유배가서 광산(혹은 채석장)에서 약 18개월 동안 강제 노동을 한 것으로 보인다(Eusebius). 본서신은 밧모 섬에서 기록되었든지(계 1:9-11) 아니면 유배가 끝나고 다시 에베소로 돌아와서 기록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상징적 숫자, 흰 색, 붉은 색, 검은 색, 청황 색, 푸른 색 등 상징성을 지닌 색깔, 양, 사자, 송아지, 독수리, 말, 황충, 용, 뱀 등 상징성을 띤 동물 등 본서신만큼 수많은 상징과 비유, 화려한 환상으로 가득 찬 책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말로 다할 수 없는 놀라운 환상과 비유(상징)를 통해 하나님께서 요한과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당시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로마 박해의 대명사 네로보다 훨씬 더 혹독하게 교회와 성도들을 박해한 인물이다. 네로 박해가 로마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면 도미티아누스의 박해는 로마 제국 전역에 걸쳐 광범위하고 가혹하게 이루어졌다. 이제는 제국 내에 있는 교회들이 가공할 만한 박해로 인해 고통하고 배교의 위협 아래 놓이게 되었다. 심지어 사도 요한도 유배지로 끌려갈 정도였다. 이런 위기 상황에 놓인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하나님은 계시를 통해 악인의 영원한 파멸과 종말을 보여 주신다. 뿐만 아니라 시험을 참고 견딘 신앙의 선배들이 거하는 영화롭고 존귀한 새 예루살렘의 모습도 보여 주신다.
비록 당장은 고통스럽고 참기 어렵지만 그러나 불 같은 시험을 이기고 승리한 자들이 참여하게 될 영원한 새 예루살렘의 영광은 현재의 고난과는 족히 비교할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세상의 주권자는 로마 황제가 아니라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더욱이 그런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이 친히 택하신 백성들을 도우고 보살펴 주신다는 것이다. 이런 위로와 격려, 넘치는 은혜와 소망이 본서신의 주제라 할 수 있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서 환상을 보고 기록한 계시의 말씀을 적어 보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곧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 지역이본서신의 주요 무대이다(계1:11).

[네이버 지식백과] 요한계시록 [REVELATION] (라이프성경사전, 2006. 8. 15., 가스펠서브)
출처 : 교회와신앙(https://www.amennews.com)
박수암 박사 / 장로회신학대학교 명예교수 신약학
II. 요한계시록의 바른 해석을 위한 바른 이해들: 통일성
III. 요한계시록의 바른 해석을 위한 바른 이해들: 구조
IV. 요한계시록의 바른 해석을 위한 바른 이해들: 상징들
V. 요한계시록의 바른 해석을 위한 바른 이해들: 해석법
VII. 일곱 촛대, 14만 4천, 성전, 두 증인, 두 감람나무와 두 촛대, 어린 양의 신부
VIII. 용, 바다에서 나온 짐승, 땅에서 올라온 짐승, 큰 바벨론, 음녀, 사망
V. 요한계시록의 바른 해석을 위한 바른 이해들: 해석법
요한계시록을 바로 해석하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교회가 요한계시록을 어떻게 해석해 왔으며, 바른 해석법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본서는 그 특유한 상징적인 성격 때문에 해석법의 이해가 중요하다. 해석법이란 어떤 사건이나 말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를 알아내는 방법을 가리키는 것으로써, 예부터 지금까지 본서를 해석하는 데 대체로 네 가지 방법이 있어 왔다.
1. 과거적 해석법(The Preterist Method)
이는 “시대사적 해석”(zeitgeschichtliche interpretation)이라고도 불리우며, 본서 21-22장을 제외하고는 본서에 기록된 사건들이 본서가 쓰여질 당시(A.D, 100년까지)에 다 이루어졌다고 보는 해석법이다. 저자는 본서에서 초대교회와 로마제국 간의 투쟁을 묘사하였으며, 그러므로 본서에 기록된 모든 사건들은 기원 후 70년 혹은 늦어도 기원 후 476년 로마의 멸망 시에 다 이루어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즉 2,3장의 우상숭배는 당시의 황제 예배를, 13장의 짐승은 네로를, 17장의 바벨론은 로마제국을 가리킨다는 등으로 보는 것이다. 이 해석법은 요한 당시의 상황이 본서에 반영되었다고 보는 점에서는 좋으나, 본서에 기록된 사실들이 전부 그 당시에 이루어졌다고 보는 점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흠이 있다. 현세의 멸망, 그리스도의 재림을 그 당시에 다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은 언어도단이며, 이런 견해는 결국 그리스도의 재림을 포함한 종말론적 사건들을 비역사화 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하는 것이다. Hentenius, Alcazar, Grotius, Bousset, Wetstein, Stuart, Ewald, De Wette, Beckwith1), J. Kallas 등이 주장한다.
2. 역사적 해석법(The Historicist Method)
이는 세계사적 해석법(weltgeschichtliche interpretation), 혹은 교회사적 해석법(kirchengeschichtliche interpretation)으로 불리우는 것으로, 본서의 환상들을 저작 당시로부터 세상 종말까지 이르는 전 역사의 축도(縮圖)로 보는 해석법이다. 위의 해석사에서 본대로 그리스도교회는 거의 1900여년 동안 이 해석법을 취해 왔다. 계시록에 나오는 모든 사건들은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 시까지의 연대순서대로 기록되었으므로, 그 사건들이 어느 시대에 해당하는 지를 알아내기만 하면 그리스도의 재림 날짜도 문제없이 알아낼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16장의 사건들은 계시록에서 4분의 3의 위치에 있으니, 그 시기를 1517년 종교개혁시대로 잡는다면 세상의 종말은 1987년이 된다는 것이다. 이 해석법을 취하는 자들은 대개 자신의 시대가 종말이 임박한 말세라 보고, 계시록이 예수의 초림부터 자신의 시대까지 일어날 일들을 예언한 예고의 책이라 본다. 이 해석법은 계시록을 그리스도의 승천부터 재림까지의 전 시대에 적용하려는 점에서는 좋으나, 계시록을 마치 계산자(slide rule)나 인류역사의 시간표처럼 취급하여, 계시록에 나오는 사건들을 자기 마음대로 어떤 특정한 인물이나 시대와 결부시키는 점은 배격해야 할 것이다. 계시록은 전체로서 교회에 주신 것이지, 이를 시기별로 나누어 각 시대에 할당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Joachim of Flora, Nicholas of Lyra2), Anselm, Luther, Wycliff, Bengel, Elliott3) Bullinger, Hengstenberg 등이 이 해석법을 주장한다.
3. 영적 해석법(The Idealist Method)
이는 본서의 사실들이 문자적으로 실현된다고 보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인류역사에 대해 행하시는 원리를 제시한 책으로 보는 해석 방법이다. 본서를 미래사에 대한 해답책으로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리스도 복음에 대한 명확한 진술을 담은 책으로 보는 것이다. 이 견해에 의하면 본서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여러 시대를 통해서 인간구원의 역사를 하고 계시는가를 진술하는 책이라는 것이다. 이 해석법의 장점은 본서가 악의 멸망과 선의 승리를 전하는 책이라고 본 것이며, 약점은 본서의 역사적 실현을 부인하고 그 원리의 제시만을 인정하는 점이다. Origen, Clement of Alexandria, Tyconius, Andreas, Augustine, Primasius, Milligan4) 등이 이 해석법을 주장한다.
4. 미래적 해석법(The Futurist Method)
이는 종국사적 해석법(endgeschichtliche interpretation)이라고도 불리우는 것으로, 본서 1-3장은 기원후 100년까지 다 이루어졌으며, 4-18장은 예수의 재림 직전에(무천년주의자, 후환난론자), 혹은 예수의 공중 재림과 지상 재림 사이에 세대론적 전천년주의자, 전환난론자) 다 이루어질 것이라 보는 해석법이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학자들 가운데는 1-3장을 기원 후 100년까지의 사건으로 보지 않고, 기원후 100년에서 재림 때까지의 사건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Darby, Walvoord를 비롯한 세대주의론자들). 이들에 의하면, 2-3장의 일곱 교회는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지림까지의 일곱 교회 시대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즉 에베소 교회는 기원후 100년까지의 초대교회, 서머나 교회는 100-313연의 니케아 회의 이전의 교회, 버가모 교회는 313-590년의 국교시대의 교회, 두아디라 교회는 590-1517년의 법왕시대교회, 사데 교회는 1517-17세기 말의 종교개혁 이후의 교회, 빌라델비아 교회는 18-19세기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는 20세기 교회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 해석볍은 본서의 예언적 종말론적인 성격을 고려할 때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해석법이라고 보여진다. 그러나 이 해석법의 치명적인 약점은 본서가 요한 당시 교회의 “생의 정황” 속에서 기록되었으며, 4장에서18장까지 나오는 환상들 가운데는 그 당시 사정에 적용되어야 할 것들이 많다는 점을 간과한 사실이다. 본서는 요한 당시의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록되었으며, 13장에 나오는 짐승은 재림 직전에 나타날 적그리스도 국가 뿐 아니라, 요한 당시의 로마 제국도 가리키고 있는 것이다. Irenaeus, Justin Martyr, Ribeira, Zahn, Thiessen, E.F. Harrison, Lohmeyer(이상은 후환난론자: 환난 후에 재림이 한번 있는 것으로 이해), Darby, Scoffield, Abraham Kuyper, Walvoord, Cohen(이상은 전환난론자: 7년 대환난 이전에 예수의 공중재림이 있는 것으로 이해) 등이 이 해석법을 주장한다.
이와 같은 상기 해석법들의 장점과 단점은 계시록을 해석함에 있어 어느 한 해석법에만 의존하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우리는 본서를 해석할 때에 이 여러 가지 해석법들을 모두 고려에 넣어야 한다(종합적 해석법 : Ellul, Mounce, Böcher 등 오늘날의 많은 학자들). 우리는 본서가 기록되던 그 당시의 형편을 생각해야 하며, 초림부터 재림 시까지의 모든 시대들에 적용해야 하고, 그러면서도 본서의 어떤 사건들은 재림 직전에 특별히 일어날 것들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 특별히 중요한 해석법을 말하라고 한다면 과거적인 해석과 미래적인 해석일 것이다. 왜냐 하면 본서는 기원 후 90년경에 교회가 당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당시의 상황과 함께 묵시문학적인 방법으로 미래에 일어날 사건들을 보여주려 했기 때문이다. 본서는 “반드시 속히 될 일”을 보여줌으로(1:1) 독자가 본서의 말씀을 “지켜주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1:3). “계시록 해석의 바른 방법은 과거적 해석과 미래적 해석을 융합하는 것이다”(Ladd, 14). 그러나 이 미래적인 해석은 세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그런 미래적인 해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 왜냐 하면, 그들은 계시록을 그리스도인들 즉 소아시아의 일곱교회 교인들을 위한 책이 아닌, 유대인들을 위한 책으로 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을 공중재림과 지상재림의 두 번 있는 것으로 전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요한 계시록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계시록으로 말하고 있지, 불신 유대인들을 위한 계시록으로 말하고 있지 않으며, 재림을 두 번이 아닌, 한 번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우리는 미래적 해석을 취하되, 전환난적 천년왕국(세대론적 전천년설)이 아닌, 후환난적 천년왕국(역사적 전천년설)의 입장에서 취할 것이다.
계시록을 해석할 때 총체적인 방법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그림을 그려 봄에서 분명해진다.

요한은 기원 후 1세기의 인물로 × 지점에 서서 임박한 그리스도의 재림을 보며 본서를 기록했다. 그러나 재림의 지연으로 인해 재림 때까지의 모든 지점들(×1, ×2, ×3. . . )에게도 요한이 × 지점에서 본 것이 적용될 수가 있게 되었다. 다시 말해 본서에 나오는 짐승은 가까이는 요한 당시의 로마제국을 가리킨 것이었지만, 재림의 지연으로 인해 재림 때까지의 모든 시대 적그리스도 국가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게 된 것이다. 본서에 나오는 많은 사건들이 가까이는 요한 당시의 시간들을, 멀리는 재림 직전의 사건들을 가리키게 된 것은 예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간적인 간격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실로 요한에게 있어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상호교용적인 것이다. 폴 미네아(Paul Minear)는 계시록의 존재론을 연구한 결론으로 요한의 자료가 역사적이며, 존재론적이며, 종말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본다. “그는 현재 즉 현존하는 실재들을 인내를 위한 현재적인 요구와 장차 있을 왕국에서의 미래 상급 사이의 분리를 면제시킬 정도로 말하고 있다. 밧모섬에서와 아시아의 일곱 도시에서 종말론적인 실재와 역사적인 실재가 융합되었다.”5) < 계속 >
1) I. T. Beckwith, The Apocalypse of John(New York : Macmillan, 1922).
2) Nicholaus von Lyra, Apocalypse Commentary(1329).
3) E. B. Elliott, Horae Apoclaypticae, 4 vols(St. Loius : Christian Publishing Company, 1898).
4) William Milligan, The Book of Revelation, The Expositor's Bible(New York : George H. Doran, 1889).
5) P. Minear, "Ontology and Ecclesiology in the Apoclaypse," NTS 12(1966), 93.
출처 : 교회와신앙(https://www.amennews.com)
https://whyjesusonly.com/questionok/8161 [재미 신학자분이심]
“그러나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 종말의 때는 예수님도 모르신다고 했습니다. 제자들더러 그 시기와 방식에 신경을 쓰지 말라는 것입니다. 대신에 깨어 있으라, 예비하고 있으라. 받은 재능을 사용하여 주의 적은 일에 충성하고 또 지극히 작은 자부터 섬기라고 당부했습니다.
주님은 부활 후 승천하기 직전에도 제자들이 이스라엘이 언제 회복할지 묻자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가 아니요”(행1:7)라고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성령의 권능을 받아 땅 끝까지 이르러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명했습니다.
삼위일체로서 성자 하나님 되시고, 아니 다시 오실 당사자인 예수님이 종말의 때를 모른다니까 의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자로 오셔서 지상 사역 중에 있는 동안에만 그렇다는 뜻입니다. 마태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표현이 미묘하게 달라진 점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런 신분으로 되돌아간 승천 직전에는 직접적으로 당신께서 모른다고 하지 않고 “너희의 알 바가 아니요”라고만 말했지 않습니까? 알고 있지만 가르쳐 줄 사항이 아니라는 의미를 내포하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은 분명히 인류의 미래, 특별히 그 종말에 관한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밝혀 놓은 책입니다. 독자로선 자연히 그 시기와 방식에 관한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구체적 시기를 밝히지 않았고 또 비밀로 둔 것 자체가 바로 당신의 뜻입니다. 당신의 권위를 한층 더 높이려는 의도가 전혀 아닙니다. 오히려 신자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구체적 시기를 밝히는 것이 그러지 않는 것보다 나쁜 점이 더 많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깊은 경륜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인간의 상식으로만 따져 봐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선 가짜 신자들이 양산될 것입니다. 종말이 다가오는 것이 확실한 데 믿지 않을 바보가 어디 있겠습니까? 설령 반신반의해도 밑져야 본전이라고 일단 교회에 출석하고 보지 않겠습니까? 또 그 반대로 세상 쾌락과 죄악을 다 즐기다가 때가 코앞에 닥쳐야 믿으려는 게으름도 부리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신자는 경건의 훈련을 미룰 여지가 다분해집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그 본성상 종말의 시기를 몰라야 항상 깨어 기도하며 할 바를 다할 것입니다. 요컨대 하나님은 신자더러 시기를 저울질 하지 말고 언제나 자발적으로 기꺼이 당신을 신령과 진정으로 경배하라는 것입니다. 또 그것이 신자가 누리는 유익의 핵심입니다. 따로 받을 복을 기대하기보다 믿음을 소지한 것 자체가 신자의 특권이자 축복인 것입니다.
말하자면 계시록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오히려 자꾸 종말의 시기와 방식에 관한 궁금증을 풀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을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다는 자체가 그 대신에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획과 그에 드러난 진리에 관심을 더 쏟으라는 뜻이지 않습니까?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이 인류 역사의 마지막에 관한 예언을 상징을 통해 요한에게 환상으로 보여주셨고, 사도는 자기가 보고 들은 바대로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책입니다. 따라서 이 책을 잘 이해하려면 성경의 예언과 묵시에 관한 지식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우선 성경의 예언(豫言)은 단순히 미래의 일을 연대기 식으로 미리 밝히는 것(foretelling)이 주목적이 아닙니다. 그런 예언은 성경 전체에 아주 특수한 몇몇 경우를 빼고는 없습니다. 당신의 뜻과 계획을 선포하는 것(forth-telling)이 주 내용입니다. 그것도 인간을 죄에서 구속하고자 하는 뜻과 계획에 초점을 둔 것입니다.
또 계시(啓示, reveal)라고 말하는 이유는 하나님 쪽에서 먼저 밝혀서 전해주어야만 알 수 있을 뿐이지 인간 스스로 상상, 추측, 추론, 도출해낸 사상이나 철학이 절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당연히 이 땅에서 이왕에 일어난 어떤 사건이나 현상이 아닙니다. 초자연적 방식으로 하나님의 절대적인 뜻이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인간에게 전해졌고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에게 그 뜻이 전해질 때에 서두의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제외하고는 구체적 말씀이 없이 주로 상징(象徵)으로 표현되는 비사(秘事)를 통해서였습니다. 그 이유는 통용 사용하는 강화언어(discourse language)로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들을 나타내려는 것입니다. 상징이란 명확한 이미지는 있되 그 구체적 뜻은 숨겨질(黙示 Apocalypse) 수밖에 없어 이해하기 어렵지만 오히려 하나로 여러 사안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경의 모든 예언은 요한계시록 뿐 아니라 이중, 삼중의 뜻을 지니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구약에서 유다의 후손에서 의로운 왕이 나타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 다윗, 히스기야, 요시야 왕을 예시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지칭한 것이지 않습니까? 또 이스라엘을 이방 대적에서 구원하여 새 예루살렘을 세울 것이라는 예언도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할 일뿐 아니라 예수님을 통한 죄인의 구원도 겸하여 예언한 것이듯이 말입니다.
예수님의 초림으로 구약 성경에 산재한 메시아 도래에 관한 중요한 이백 여개의 예언은 이미 이뤄졌습니다. 그러나 재림 때까지 그 실현이 미뤄진 마지막 날의 심판에 관한 예언도 그만한 숫자만큼 많은데 꼭 요한계시록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닙니다. 에스겔서와 다니엘서를 비롯한 구약선지서와 신약성경 곳곳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제 계시록을 이해하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 몇 가지를 도출할 수 있습니다. 우선 일정표식으로 이해하려 들지 말고 그 배경의 하나님의 뜻과 계획 즉, 그분이 인류를 다루시는 원리에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또 한 가지 상징과 예언이 그 연대나 구체적 실현 모습에서도 다양한 뜻으로 해석될 수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한 구절이 이미 일어난 일과 앞으로 일어날 일을 동시에 의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아가 비사와 상징이기에 현실의 역사에 너무 구체적으로 대입 적용하려 들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원칙이란 어디까지나 원칙에 불과하므로 실제 해석에 적용하려면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래서 신학자들 간에도 계시록을 해석하는 입장이 그야말로 천차만별입니다. 어느 누가 확정적으로 옳고 그르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초림이 있고 난 후에 구약의 메시아 도래에 관한 예언이 명확히 해석되어졌듯이 종말에 대한 예언 또한 실제로 그 때가 되고난 이후라야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 성경 해석이 확정되어봐야 사실상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마지막이, 아니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도래한 다음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초림보다 재림의 예언이 더욱 묵시적인 형태를 띨 수밖에 없는 이유도 인간에게 더 이상 다른 유예 시기나 수단이 없어지는 마지막이기에 그러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모든 죄인에게 정말 아무도 모르는 불시에 최후의 심판이 임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결국 계시록 해석에 관한 학자들 간의 입장이 나눠지는 핵심 이유도 시기(時期) 때문입니다. 이 시기를 따지는 입장은 전체적인 측면과 세부적인 측면 두 가지로 나뉩니다. 시기를 대략 혹은 세밀히 맞춰보려는 시도를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계시록 전체 내용을 특정한 시대로 나눠 적용하려는 시도와 동시에 천년왕국과 재림의 전후 순서를 밝혀 보려는 시도 두 가지 이론이 있다는 뜻입니다. 물론 후자는 아무래도 전자의 결론에 따라 영향을 받게 됩니다. 먼저 전체적 시기에 관한 대표적 이론들을 간단히 알아봅시다.
(이에 대해선 아가페 출판사가 1988년 발간한 “오픈성경”의 요한계시록 서론의 설명이 아주 알기 쉽게 잘 구별하였기에 발췌하여 전재하되 제 의견을 간단히 첨부하겠습니다.)
본서를 해석하는 이론으로 대표적으로 과거파, 역사파(세계사 혹은 교회사 학파), 온건미래파, 극단적 미래파(세대주의), 이상주의 다섯을 들 수 있습니다.
저자인 사도 요한 당대의 사건을 기록한 것이라는 이론입니다. 로마 제국의 핍박받는 성도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기 위해 씌어졌는데, 박해를 피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유대 묵시문학의 방식을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즉, 짐승은 로마 제국(혹은 황제들)이며 거짓 선지자는 황제 숭배교라는 것입니다. 로마 제국의 멸망은 임박했기에 인내로 싸워 승리할 것을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이 학파는 계시록을 언약의 맥락에서 보아 그 주제가 배교에 대한 계약적 위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계약을 파기한 예루살렘(유대교)의 파멸을 예언한 것으로 선지자들을 죽인 예루살렘 도성에 쏟아지는 어린 양의 진노의 심판을 묘사한다는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의 파멸은 영원한 경고로서 기독교 교회에 주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항상 인류사가 아닌 교회사를 다룬다는 관점에서 볼 때 본서는 신32장의 정신으로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과거파의 입장은 본서가 요한 당대의 삶의 정황 속에서 그 당대 독자들에게 기본적으로 의미를 주기 위해 씌어졌다고 보는 점에서 옳습니다. 그러나 본서 저자가 예언(1:3)이라고 밝혔고 또 분명 종말을 말하고 있다는 점에서 과거파의 약점이 있습니다.
세계사(혹은 교회사) 전체를 계시해 주는 것으로 보는 이론입니다. 그렇게 해석하는 근거는 본서에 역사의 종점과 시발점이 제시 되어 있고 그 두 지점 사이에 어떤 단절도 예상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파에 속한 학자들은 계시록에서 역사적 사건들의 세세한 성취를 찾아내려 합니다. 또 이러한 역사 맞추기는 학자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점은 본서는 역사라는 열차의 “시간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때와 시간 계산의 자료로 사용하는 것은 극히 바람직스럽지 못합니다. 역사상으로 여러 예언이 계시록에 근거하야 나왔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고 잘못된 종파 운동을 초래한 사실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극단 미래파(세대주의)와 구별하여 붙인 이름입니다. 본서는 처음 세 장들을 제하고는 거의 전부가 주의 재림 직전의 어느 기간 동안에 일어날 종말 사건들을 다룬다고 해석합니다.
극단 미래파와 다른 점은 첫째, 그리스도의 가견적(可見的)인 재림에 앞선 교회의 “은밀한 휴거설”을 반대합니다. 둘째, 4장 이하를 순전히 유대인들에게 국한시키는 것을 반대합니다. 다시 말해 교회와 이스라엘의 구분을 인정치 않는 것입니다. 셋째, 계 2-3장의 일곱 교회들이 교회사 전체를 각기 가리킨다고 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1:19)에 근거하여 계시록을 다음과 같이 그 세대를 나누는 이론입니다.
먼저 1장은 요한이 본 바 부활하신 예수님의 환상이며, 2-3장은 이제 있는 일로 교회사 전체를 다룬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즉 예배소 교회는 사도말기교회, 서머나는 로마 박해 시의 교회, 버가모는 정교(政敎) 결탁 시의 교회, 두아디라는 중세기의 교회, 사데는 종교 개혁기의 교회, 빌라델비아는 종교 개혁 이후의 참 교회, 라오디게아는 현대 교회를 나타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4장 이하는 장차 될 일을 다룬다고 합니다. 말하자면 다니엘의 70째 이레에 해당하는 “7년 대환난기”인 “야곱의 환난기”(렘30:7) 에 대한 묘사라는 것입니다.
이들에 의하면 교회는 구약예언의 성취가 아니요 단지 임시방편으로 세워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왕으로 임하셨으나 유대인들이 거부하였으므로 그의 왕국은 천년왕국으로 연기되고 임시방편으로 “신약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이는 신약의 가르침에 정면으로 상충하는 사상입니다. 우선 일곱 교회는 요한 당시의 실제 교회들의 상황을 그대로 담고 있으며 또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들의 특징을 드러낸 것입니다. 칼빈이나 루터가 세운 교회도 많은 잘못을 범했듯이 인간이 모인 지상 교회는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오순절 이후로 지금까지의 신약교회는 예수님이 머리가 되고 성령이 역사하는 것을 지향하기에 하나님의 뜻 안에선 참 교회입니다. 이 외에도 이스라엘의 회복과 교회의 휴거를 강조하느라 여러 무리한 문자적 해석이 동원되었습니다.
계시록이 어떤 구체적인 사건을 예언한다기보다는 영원한 진리, 즉 하나님의 통치 원리, 선악간의 투쟁, 선의 궁극적인 승리 등을 말하고 있다고 봅니다. 이상주의파는 본서가 저작 당시의 정황을 배경으로 삼고 나온 점을 십분 인정합니다. 상징(imagery)은 당대의 상황에서 취해졌지만 상징으로 제시된 그 모두는 모든 세대에 영원한 진리를 가르친다고 합니다.
위에서 약술한 해석 체계들은 대개 다른 해석 체계들과 상호 연관되어 사용됩니다. 한 해석자(Swete)는 “나는 전체로서 어떤 학파를 일방적으로 따르지 않고 모든 해석 체계들과 접촉점을 갖도록 할 것이다. 예컨대, 과거파에서는 저작 당시의 상황을, 미래파에서는 요한의 예언이 장차 올 시대의 상황을, 이상주의파에서는 기독교의 역사 철학을, 역사파에서는 사건들의 진행에서 대원리들이 어떻게 작용했나하는 예증을 볼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아무리 건전한 해석 원리를 갖고서 본서의 해석 작업에 임한다 해도 완전한 해석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인간의 지혜는 유한하여 항상 실수할 가능성이 있음을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뜻과 길은 우리와 다를 뿐 아니라 당신께서 종말에 관한 구체적인 시기와 방식을 비밀로 하고 싶어 하시어서 상징으로 묵시하였기에 제대로 알 수도 없습니다.
따라서 신자는 계시록에 드러난 하나님이 인류와 역사를 다루시는 원리를 깨달아서 항상 깨워서 대비하고 그분의 뜻대로 살며 믿음을 키우는 일에만 적용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일일이 현실 역사에 부합하는 일정표를 만들겠다고 시도하는 것은 잘못이자 그분에게 불경하기까지 합니다. 오직 성령님이 조명하시는 역사를 간구하며 읽어야 할 것입니다.
또 예의 신학자처럼 여러 해석 체계들에서 취할 것은 취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할 것입니다. 전적으로 한 가지 체계만 고수하면 어떤 형태가 되었든 일정표를 그리는 작업이 됩니다. 또 그런 잘못을 피하고자 이상주의파만 따르면 역사에 개입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개념상의 하나님에 머물게 하는 잘못을 범하게 됩니다.
여러 학파의 장점을 취하기 위해선 오히려 계시록 이전의 신구약 성경에 정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을 아무리 믿음이 좋은 신자라도 세밀하게 알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은 절대로 신실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당신의 뜻에, 특별히 당신이 택한 백성들과 맺은 언약에 변개, 수정, 가감, 포기는 없습니다.
그래서 당신께서 이미 구약과 신약 역사에 간섭하신 모습과 그것을 설명하는 성경의 진리들을 비교 묵상하면 미래도 어느 정도 그 원리적인 측면에서 추측이 가능합니다. 한 마디로 갈 바 모르지만 믿음으로 대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신자에게 계시록을 주신 초점은 요한 당시 핍박 받는 정황에서나, 신약이후 지금껏 교회사의 피 흘린 체험에서나, 종말에 닥칠 대환난에서나 믿음으로 끝까지 견디라는 것이지 않습니까?
바꿔 말해 예수님의 십자가 진리는 대다수 사람들로부터 외면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삶은 머리 둘 곳도 없이 좁고 협착한 길을 따르는 것입니다. 그분의 제자답게 온전히 산다면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두려워 할 것 하나 없습니다. 하늘과 땅위의 권세를 다 가지신 예수님이 항상 함께 하시지 않습니까?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16:33)
특별히 신자가 어떤 환난에도 담대할 수 있는 근거에 주목해야 합니다. 기도하면 예수님이 큰 권능으로 환난을 다 막아주시고 구해주신다는 단순한 뜻이 아닙니다. 골고다 십자가에서 당신께서 이미 완벽한 승리를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와 함께 하는 권세도 바로 그것입니다. 죄악과 사단과 사망이 더 이상 우리를 노예로 묶어둘 수 없는 신분으로 바뀐 것입니다. 대환난이 닥쳐서 순교해도 영원한 운명이 보장되어 있기에 예수님의 품 안에서 다시 깨어날 것입니다.
바꿔 말해 “끝까지 견디어 이기라”는 것이 계시록에서 신자가 가장 먼저 또 중요하게 깨달아야 할 핵심 사항입니다. 바울이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고후12:4)이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었던 뜻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장 논리 정연한 그에게 천국과 종말에 관한 성경을 기록케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가 기록했다면 후대 사람들로선 어쩌면 더 구체적인 추정이 가능했을 것 아닙니까? 때와 기한은 오직 그분께 달려 있으므로 우리는 깨워 경성하며 하루하루 적은 일에 충성하며 신자답게 빛과 소금이 되어 있으면 됩니다. //